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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포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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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포샤르는 18세기 프랑스의 치과의사로, '근대 치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외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치과의사라는 직업명을 표방하고, 치아와 구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1728년에는 치의학을 집대성한 저서 《치과외과의》를 출간하여 치아의 구조, 질병, 치료법 등을 상세히 다루었으며, 다양한 구강 외과용 도구를 소개하고 치아 교정술을 발전시켰다. 그는 당시 비법으로 여겨지던 치의학 지식을 공개하고, 103가지 구강 질환의 증상과 치료법을 제시하며, 치아 우식증의 원인으로 설탕을 지목하는 등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의 연구는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의학도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초에 재조명되어 치의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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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포샤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J. 르 벨이 그린 포샤르의 초상화
J. 르 벨이 그린 포샤르의 초상화
출생일1679년 1월 2일
출생지생드니드가스틴, 마옌주, 프랑스
사망일1761년 3월 21일 (82세)
사망지파리, 프랑스
직업의학, 치과의학
활동 분야프랑스 왕립 해군, 앙제 대학교 병원
주요 업적많은 치과 진료법 도입
수상피에르 포샤르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

2. 생애

1678년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에서 태어났다. 15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외과 의사 알렉상드르 포틀레의 견습생이 되었다. 포틀르레는 괴혈병 등 치아 및 구강 질환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3년 후, 포샤르는 앙제에서 구강 및 치아 분야를 전문으로 개업하고, 낭트, 등지에서 출장 진료를 했다. 당시 발치사나 떠돌이 약장수가 치아를 다루던 시대에 포샤르는 외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치과의사라는 새로운 직업명을 표방했다.

피에르 포샤르가 17세기 후반에 보철학에 사용하기 위해 설계한 치과용 롱노우즈 플라이어


18세기 초 포샤르가 자신의 저서에서 의치 제작에 관련된 절차를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앙제 대학교 병원에서 의료 행위를 하며, 포샤르는 과학적인 구강악안면외과의 선구자로서 혁신적인 연구를 시작했다.[2]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의 원시적인 수술 도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숙련된 외과 의사로 인정받았다.[2] 시계 제조공, 보석상, 이발사의 도구를 개조하여 치과용 도구를 개량하기도 했다.[2]

포샤르는 치과 충전을 충치 치료법으로 도입하고, 타르타르산과 같은 설탕 유도체 산이 치아 부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2] 또한 잇몸의 치아 주변 종양이 치아 부식의 후기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제안했다.[2] 그는 보철학의 선구자로, 잃어버린 치아를 대체하는 여러 방법을 발견했다.[2] 상아 블록으로 인공 치아를 만들고, 지레를 사용하여 금색 와이어나 왁스 처리된 실로 고정하는 방법을 제안했다.[2] 치아 교정기를 도입하여 치아 위치를 교정하기도 했다.[2]

1716년부터 1718년까지 포샤르는 큰 명성을 얻었고, 프랑스 전역의 외과 의사들과 의학적 경험을 공유했다.[2] 1718년 파리로 이주한 그는 치과 관련 훌륭한 교과서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 치과의사 논문을 쓰기로 결심했다.[2]

마흔 즈음에 파리로 진출한 포샤르는, 당시 외과학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학문이 세분화되는 상황에서 파리 의사들로부터 구강 및 치아 질병 치료를 의뢰받았고, 대부분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는 해부학 및 외과학 지식과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치아와 구강의 구조, 질병, 치료법, 특이 사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직접 개발한 기구 도판을 첨부하여 784쪽에 달하는 원고를 완성했다. 1723년, 45세의 나이에 ''"Le Chirurgien Dentiste" ("외과 치과의사"로 대략 번역됨)''라는 600페이지 분량의 첫 번째 원고를 완성했다.[2] 이후 5년 동안 동료들의 피드백을 받아 1728년 두 권으로 출판했다.[2] 이 책은 유럽 의학계에서 호평을 받았으며,[2] 1733년 독일어 번역본, 1746년 프랑스어 확장판이 출판되었고, 영어 번역본은 1946년에 출판되었다.[2]

자신의 비법을 공개하지 않는 당시 관행을 깨고, 주변 동업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여 대중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진정성은 책 내용 곳곳에 드러나 있다. 1761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프랑스 치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20세기 초에 재발견되어 '근대 치의학의 아버지'로 추대되었다.

2. 1. 초기 생애

피에르 포샤르는 1679년 생-드니-드-가스틴의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다. 1693년, 14세의 나이에 가족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치아와 구강 질환에 대한 상당한 연구를 한 수석 외과 의사 알렉상드르 포틀레의 영향을 받았다.

포샤르는 장기간 항해를 하는 선원들이 특히 괴혈병과 같은 치아 질환으로 심하게 고통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틀레는 그에게 치료술에 대한 선배들의 연구 결과를 읽고 면밀히 조사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실제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바다에서 얻은 지식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으며, 포샤르는 포틀레의 제자로서 전투 의무병이 되었다. 해군 퇴직 후, 1698년 앙제에서 치과의사 개업의가 되었다.

2. 2. 치과의사로서의 삶

1678년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에서 태어난 피에르 포샤르는 15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외과 의사 알렉상드르 포틀르레의 견습생이 되었다. 포틀르레는 괴혈병 등 치아 및 구강 질환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3년 후, 포샤르는 앙제에서 구강 및 치아 분야를 전문으로 개업하고, 낭트, 등지에서 출장 진료를 했다. 당시 발치사나 떠돌이 약장수가 치아를 다루던 시대에 포샤르는 외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치과의사라는 새로운 직업명을 표방했다.

앙제 대학교 병원에서 의료 행위를 하며, 포샤르는 과학적인 구강악안면외과의 선구자로서 혁신적인 연구를 시작했다.[2]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의 원시적인 수술 도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숙련된 외과 의사로 인정받았다.[2] 시계 제조공, 보석상, 이발사의 도구를 개조하여 치과용 도구를 개량하기도 했다.[2]

포샤르는 치과 충전을 충치 치료법으로 도입하고, 타르타르산과 같은 설탕 유도체 산이 치아 부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2] 또한 잇몸의 치아 주변 종양이 치아 부식의 후기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제안했다.[2] 그는 보철학의 선구자로, 잃어버린 치아를 대체하는 여러 방법을 발견했다.[2] 상아 블록으로 인공 치아를 만들고, 지레를 사용하여 금색 와이어나 왁스 처리된 실로 고정하는 방법을 제안했다.[2] 치아 교정기를 도입하여 치아 위치를 교정하기도 했다.[2]

1716년부터 1718년까지 포샤르는 큰 명성을 얻었고, 프랑스 전역의 외과 의사들과 의학적 경험을 공유했다.[2] 1718년 파리로 이주한 그는 치과 관련 훌륭한 교과서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 치과의사 논문을 쓰기로 결심했다.[2]

마흔 즈음에 파리로 진출한 포샤르는, 당시 외과학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학문이 세분화되는 상황에서 파리 의사들로부터 구강 및 치아 질병 치료를 의뢰받았고, 대부분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는 해부학 및 외과학 지식과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치아와 구강의 구조, 질병, 치료법, 특이 사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직접 개발한 기구 도판을 첨부하여 784쪽에 달하는 원고를 완성했다. 1723년, 45세의 나이에 ''"Le Chirurgien Dentiste" ("외과 치과의사"로 대략 번역됨)''라는 600페이지 분량의 첫 번째 원고를 완성했다.[2] 이후 5년 동안 동료들의 피드백을 받아 1728년 두 권으로 출판했다.[2] 이 책은 유럽 의학계에서 호평을 받았으며,[2] 1733년 독일어 번역본, 1746년 프랑스어 확장판이 출판되었고, 영어 번역본은 1946년에 출판되었다.[2]

자신의 비법을 공개하지 않는 당시 관행을 깨고, 주변 동업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여 대중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진정성은 책 내용 곳곳에 드러나 있다. 1761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프랑스 치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20세기 초에 재발견되어 '근대 치의학의 아버지'로 추대되었다.

3. 업적

1728년 피에르 포샤르는 《치과외과의(Le Chirurgien Dentiste)》를 출간했다.[2] 이 책은 2권으로 구성되었으며, 1권에는 38장, 2권에는 26장으로 치의학 교육, 치아 해부학, 충치, 병리학, 치료학, 교정학, 외과, 재식립 및 이식, 구강 질환, 치주농루, 출혈 및 지혈제, 수술 및 보철 치의학 등을 다루었다.[4] 또한, 석판화로 제작된 수술 도구 및 기기 42개가 포함되어 있었다.[4]

포샤르는 이 책에서 구개 폐쇄기, 치과용 드릴 등 구강 외과용 발명품들을 소개했다.[8] 그가 개발한 드릴은 수동식이었으며 고양이 창자로 구동되었다.[8] 또한 치수염에 정향과 계피 오일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8]

포샤르는 충치 치료에 인소변 사용을 권장했는데, 당시에는 소변 속 암모니아의 효능을 알지 못했지만, 고대부터 중세 시대까지 사용된 방법이었다.[8] 그는 103가지 구강 질환의 증상과 치료법을 설명했으며,[4] 치아벌레설을 반박하고 현미경 관찰을 통해 벌레가 없음을 확인했다.[8] 또한 치아 우식증의 원인이 설탕이라고 주장하며 식단에서 설탕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8]

포샤르는 젖니가 치근에서 분리된다는 주장을 통해 자연 치아 생성 이론을 반박했다.[8] 그는 치아 충치 치료법으로 아말감을 포함한 치과용 충전재 사용을 제안했으며, 치아를 주기적으로 청소해야 한다고 말했다.[8] 또한 치아 교정기를 사용하여 치아 위치를 교정해야 하며, 어린이의 치아가 성인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이유는 치아 뿌리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8]

포샤르는 환자를 맞이하는 방법과 자세 등 의학적 관행에서 시대를 앞섰으며, 치과 의사가 환자 뒤에 서서 진료하고 치과용 의자 조명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8]

《치과외과의》는 1733년 독일어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1746년에는 프랑스어 확장판이 출판되었으며, 영어 번역본은 1946년에 출판되었다.[2]

피에르 포샤르는 18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치과의사로, 근대 치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당시 치과 치료는 이발사나 발치업자에게 맡겨지곤 했는데, 이들은 펠리칸(pelican)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이를 뽑았으나, 정밀도가 떨어져 문제가 있는 이와 함께 건강한 이를 뽑거나 턱의 일부를 제거하는 경우가 많았다.[3] 포샤르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외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치과의사(chirurgien dentiste)라는 새로운 직업명을 표방하며 치아 연구를 하는 외과의사로서의 차별성을 보였다.[3]

1699년 파리 의학부가 "expert pour les dents" (치아 전문가)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칙령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치아 치료에 대한 규제가 없었다.[5] 포샤르는 의학계가 치아를 거의 무시해 온 것을 개탄하며, "가장 유명한 외과 의사들이 이 분야를 포기하거나, 적어도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이론이나 경험 없이 이 분야를 퇴보시키고, 원칙이나 방법 없이 무작위로 시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비판했다.[6] 그는 발치 시술자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발치술을 배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치아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치아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믿었다.[3]

포샤르는 1728년치과의사》를 출간하여 치아와 구강의 구조, 질병, 치료법, 특이 사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자신이 직접 개발한 기구의 도판까지 첨부하여 당시의 비법(秘法)을 공개하지 않는 관행을 무너뜨렸다. 주변 동업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일반 대중에게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는 그의 진정성을 보였다. 이 책은 치의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독자적 저술로 평가받는다.

포샤르는 치아 관리 방법으로 매일 아침 물로 입을 헹구고 젖은 스펀지로 이를 닦는 것을 제안했다. 또한 물에 약간의 에탄올을 섞은 세척액을 권장했으며, 칫솔은 천이나 린넨 대신 스펀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그는 벽돌, 도자기, 경석, 소성 활석, 소성 알루미늄과 같은 일반적인 치약 성분이 해롭다고 지적했으며, 소렐, 레몬즙, 황산염, 소금의 즙 또한 법랑질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포샤르가 권장하는 치약은 산호, 용의 피, 구운 꿀, 씨앗 진주, 오징어 뼈, 가재 눈, 볼 다르메리, 테르 시질레, 테르 헤마타이트, 계피, 소성 명반을 미세한 가루로 혼합한 것이다.[7] 그러나 그는 물로 칫솔질하고 헹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러한 치약을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7]

포샤르는 103가지 구강 질환의 증상과 치료법을 설명했으며,[4] 치아벌레설이 치아 부식을 설명하는 데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결과 벌레의 증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8] 또한 치아 우식증의 원인이 설탕이며, 사람들은 식단에서 설탕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 그는 젖니가 그 치근으로부터 분리된다고 주장하여 젖니에 치근이 없다고 믿었던 당시 치과 의사들의 믿음과는 다른 주장을 하였다.[8] 그는 치아 충치 치료법으로 치과용 충전재를 도입했으며, 아말감을 , 주석, 그리고 때로는 금과 같이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치아는 치과 의사에 의해 주기적으로 청소되어야 한다고 말했다.[8] 그는 치아의 위치를 교정하기 위해 치아 교정기를 사용해야 하며, 어린이의 치아가 성인보다 더 쉽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데, 이는 치아 뿌리의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8]

포샤르는 의학적 관행에서 시대를 앞섰으며, 의사가 환자를 맞이하는 방법과 환자가 앉아야 하는 자세를 설명했다.[8] 그는 치과 의사가 환자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환자 뒤에 서 있어야 하며, 치과용 의자 조명의 개념을 도입했다.[8]

3. 1. 《치과외과의》 출간

1728년 피에르 포샤르는 《치과외과의》(Le Chirurgien Dentiste)를 출간했다.[2] 이 책은 2권으로 구성되었으며, 1권에는 38장, 2권에는 26장으로 치의학 교육, 치아 해부학, 충치, 병리학, 치료학, 교정학, 외과, 재식립 및 이식, 구강 질환, 치주농루, 출혈 및 지혈제, 수술 및 보철 치의학 등을 다루었다.[4] 또한, 석판화로 제작된 수술 도구 및 기기 42개가 포함되어 있었다.[4]

포샤르는 이 책에서 구개 폐쇄기, 치과용 드릴 등 구강 외과용 발명품들을 소개했다.[8] 그가 개발한 드릴은 수동식이었으며 고양이 창자로 구동되었다.[8] 또한 치수염에 정향과 계피 오일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8]

포샤르는 충치 치료에 인소변 사용을 권장했는데, 당시에는 소변 속 암모니아의 효능을 알지 못했지만, 고대부터 중세 시대까지 사용된 방법이었다.[8] 그는 103가지 구강 질환의 증상과 치료법을 설명했으며,[4] 치아벌레설을 반박하고 현미경 관찰을 통해 벌레가 없음을 확인했다.[8] 또한 치아 우식증의 원인이 설탕이라고 주장하며 식단에서 설탕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8]

포샤르는 젖니가 치근에서 분리된다는 주장을 통해 자연 치아 생성 이론을 반박했다.[8] 그는 치아 충치 치료법으로 아말감을 포함한 치과용 충전재 사용을 제안했으며, 치아를 주기적으로 청소해야 한다고 말했다.[8] 또한 치아 교정기를 사용하여 치아 위치를 교정해야 하며, 어린이의 치아가 성인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이유는 치아 뿌리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8]

포샤르는 환자를 맞이하는 방법과 자세 등 의학적 관행에서 시대를 앞섰으며, 치과 의사가 환자 뒤에 서서 진료하고 치과용 의자 조명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8]

《치과외과의》는 1733년 독일어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1746년에는 프랑스어 확장판이 출판되었으며, 영어 번역본은 1946년에 출판되었다.[2]

3. 2. 치의학 발전에 미친 영향

피에르 포샤르는 18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치과의사로, 근대 치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당시 치과 치료는 이발사나 발치업자에게 맡겨지곤 했는데, 이들은 펠리칸(pelican)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이를 뽑았으나, 정밀도가 떨어져 문제가 있는 이와 함께 건강한 이를 뽑거나 턱의 일부를 제거하는 경우가 많았다.[3] 포샤르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외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치과의사(chirurgien dentiste)라는 새로운 직업명을 표방하며 치아 연구를 하는 외과의사로서의 차별성을 보였다.[3]

1699년 파리 의학부가 "expert pour les dents" (치아 전문가)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칙령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치아 치료에 대한 규제가 없었다.[5] 포샤르는 의학계가 치아를 거의 무시해 온 것을 개탄하며, "가장 유명한 외과 의사들이 이 분야를 포기하거나, 적어도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이론이나 경험 없이 이 분야를 퇴보시키고, 원칙이나 방법 없이 무작위로 시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비판했다.[6] 그는 발치 시술자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발치술을 배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치아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치아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믿었다.[3]

포샤르는 1728년 《치과의사》를 출간하여 치아와 구강의 구조, 질병, 치료법, 특이 사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자신이 직접 개발한 기구의 도판까지 첨부하여 당시의 비법(秘法)을 공개하지 않는 관행을 무너뜨렸다. 주변 동업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일반 대중에게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는 그의 진정성을 보였다. 이 책은 치의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독자적 저술로 평가받는다.

포샤르는 치아 관리 방법으로 매일 아침 물로 입을 헹구고 젖은 스펀지로 이를 닦는 것을 제안했다. 또한 물에 약간의 에탄올을 섞은 세척액을 권장했으며, 칫솔은 천이나 린넨 대신 스펀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그는 벽돌, 도자기, 경석, 소성 활석, 소성 알루미늄과 같은 일반적인 치약 성분이 해롭다고 지적했으며, 소렐, 레몬즙, 황산염, 소금의 즙 또한 법랑질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포샤르가 권장하는 치약은 산호, 용의 피, 구운 꿀, 씨앗 진주, 오징어 뼈, 가재 눈, 볼 다르메리, 테르 시질레, 테르 헤마타이트, 계피, 소성 명반을 미세한 가루로 혼합한 것이다.[7] 그러나 그는 물로 칫솔질하고 헹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러한 치약을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7]

포샤르는 103가지 구강 질환의 증상과 치료법을 설명했으며,[4] 치아벌레설이 치아 부식을 설명하는 데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결과 벌레의 증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8] 또한 치아 우식증의 원인이 설탕이며, 사람들은 식단에서 설탕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 그는 젖니가 그 치근으로부터 분리된다고 주장하여 젖니에 치근이 없다고 믿었던 당시 치과 의사들의 믿음과는 다른 주장을 하였다.[8] 그는 치아 충치 치료법으로 치과용 충전재를 도입했으며, 아말감을 , 주석, 그리고 때로는 금과 같이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치아는 치과 의사에 의해 주기적으로 청소되어야 한다고 말했다.[8] 그는 치아의 위치를 교정하기 위해 치아 교정기를 사용해야 하며, 어린이의 치아가 성인보다 더 쉽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데, 이는 치아 뿌리의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8]

포샤르는 의학적 관행에서 시대를 앞섰으며, 의사가 환자를 맞이하는 방법과 환자가 앉아야 하는 자세를 설명했다.[8] 그는 치과 의사가 환자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환자 뒤에 서 있어야 하며, 치과용 의자 조명의 개념을 도입했다.[8]

4. 재조명과 유산

포샤르의 연구는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많은 젊은 의학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9] fr(1702–1748)은 포샤르와 같은 치과의사로, 그의 삶의 많은 시간을 치아 에나멜 형성 부전 연구에 쏟았다.[9]

에티엔 부르데(1722–1789)는 포샤르 이후 프랑스 최고의 치과의사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연구는 주로 치과 보철(피에르가 도입한 개념)에 기반을 두었다.[9] 그는 또한 아말감 제조 방식을 개선했으며, 필요에 따라 환자에게 치은절제술을 시행한 최초의 의사이기도 하다.[9]

19세기 미국의 치과의사 채핀 A. 해리스는 그를 자주 인용하며 "그의 시대의 상황과 한계를 고려할 때, 그는 항상 현대 치의학의 선구자이자 창시자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했다.[9]

포샤르의 유명한 치의학 논문은 18세기에 출판되었지만, 의학사학자 릴리안 린지가 영어 번역본을 출판한 것은 1946년이었다.[9]

1936년에 설립된 치의학 관련 단체인 피에르 포샤르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포샤르는 1961년 그의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우표에 등장했다.[10]

5. 저서

1728년 포샤르는 석판화로 제작된 수술 도구 및 기기 42개가 포함된 저서 《치과외과의》를 출간했다. 이 책은 1권에 38개의 장, 2권에 26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치의학 교육, 치아 해부학, 충치, 병리학, 교정학, 외과, 구강 질환, 치주농루 등 치의학의 다양한 분야를 포괄했다.[4]

포샤르는 이 책에서 구개 폐쇄기와 치과용 드릴 등 자신이 개발한 많은 구강 외과용 발명품들을 소개했다. 그가 개발한 드릴은 수동식이었으며 고양이 창자로 구동되었다. 그는 치수염에 정향과 계피 오일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8]

포샤르는 충치 치료에 인소변을 사용할 것을 권장했는데, 소변 속 암모니아 성분이 효과를 낸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치료법은 당시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8]

1733년에는 "프랑스 치과의사(Der Französische Zahnarzt)"를 저술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Fauchard, Pierre https://www.biusante[...] Bibliothèque interuniversitaire de Santé, Université de Paris (Base biographique) 2021-02-08
[2] 논문 The birth of the most important 18th century dental text: Pierre Fauchard's ''Le chirurgien dentist''
[3] 논문 Pulling Teeth in Eighteenth-Century Paris https://www.jstor.or[...] 2000
[4] 논문 Did Dentistry Evolve from the Barbers, Blacksmiths or from Medicine? https://www.jstor.or[...] 1940
[5] 논문 The King's Two Teeth https://www.jstor.or[...] 2008
[6] 논문 The Historical Relations of American Dentistry and Medicine https://www.jstor.or[...] 1954
[7] 논문 Antiques of Medical Interest: Tooth brush set, Silver, London, 1799 https://www.jstor.or[...] 1947
[8] 웹사이트 Who is Pierre Fauchard? https://fauchard.org[...] Pierre Fauchard Academy 2024-06-03
[9] 웹사이트 Dentistry practice in Spain and France during the 18th century http://html.rinconde[...] The free info's corner 2006-07-22
[10] 간행물 On Being First https://www.jstor.or[...] ANU Press 2020-11-19
[11] 웹사이트 日本大学図書館歯学部分館 貴重書特別展示  歯科医学の父 ピエールフォシャール 展 展示目録 https://www.dent.nih[...] 日本大学歯学部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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